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에마뉘엘 그루시 (문단 편집) === 혁명 이후 === [[새옹지마|혁명 이후 공화파에게 좋은 평가를 받아 1792년에 혁명전쟁이 발발하자 고위 귀족이었음에도 그루시는 기병 연대장으로 복직, 곧 이어서 소장(Maréchal de camp)으로 진급하여 남동부 최전선으로 갔다.]] 그리고 1793년에 [[방데 전쟁]]이 발발했을 때 봉기군을 진압하면서 크게 활약했고, 그 전공으로 사단장까지 진급했다. 하지만 [[막시밀리앙 드 로베스피에르|로베스피에르]]의 공포 정치 시대에 출신 성분이 문제가 되어 일시적으로 군에서 나와야 했지만 목숨에는 지장이 없었고 이내 복귀할 수 있었다. 1795년에는 아일랜드 원정군의 참모로서 종군했으며, 혁명군의 아일랜드 원정에서 중요한 부분을 담당했다. 1798년에는 사르데냐 국왕의 퇴위와 더불어 피에몬테의 군정 [[총독]]으로서 부임했다. 또한 1799년에는 오스트리아-러시아 연합군을 상대로 한 전쟁에서 사단 지휘관으로서의 훌륭한 역량을 보여주어 그의 능력을 입증했다. 그러나 노비 전투에서 패배해 퇴각하는 프랑스군의 사이에 섞여서 퇴각하던 그루시는 14군데에 부상을 입고 포로로 붙잡혔다. 그 후 곧 석방되어 그는 프랑스로 돌아올 수 있었다. [[브뤼메르 18일의 쿠데타]] 당시, 이에 소극적으로 반대 입장을 표명했지만, 나폴레옹에게도 중용되어 호엔린덴 전투에서 또 다시 큰 전과를 올렸다. 그루시가 새 체제에 순응한 것은 얼마 되지 않았지만, 그럼에도 그는 나폴레옹 휘하에서 여러 차례 전쟁에 참가하게 되었다. 1805년의 [[제3차 대프랑스 동맹 전쟁|오스트리아 전쟁]], 그 후의 [[제4차 대프랑스 동맹 전쟁|독일·폴란드 원정]], 그리고 1808년의 [[이베리아 반도 전쟁]]에 참가했다. 특히 독일·폴란드 원정 중 벌어진 [[아일라우 전투]]와 [[프리틀란트 전투]]에서는 크게 활약했다. 1809년에는 이탈리아군의 기병대 지휘관에 임명되어 이탈리아 [[부왕]] [[외젠 드 보아르네]]의 빈 진군에 함께했다. 1812년의 [[러시아 원정]] 당시, 그루시는 대육군의 네 개 기병군단을 지휘했고, 스몰렌스크와 보로디노의 격전에서 기병대를 지휘했으며, 모스크바 후퇴 당시 나폴레옹은 그루시에게 호위대의 지휘를 맡겼다. 그렇지만 화려했던 그루시의 기병대장 역할은 1813년 나폴레옹이 그루시를 군단장으로 올리면서 끝났고, 게다가 프랑스로 돌아가게 되었다. 1814년에는 [[나폴레옹의 몰락|프랑스 방위 전쟁]]에서 방어전을 지휘하며 분전했지만 크라온 전투에서 큰 부상을 입게 되었다. 그 후 퐁텐블로 조약에 따라 나폴레옹이 실각하고, [[부르봉 왕조]]가 복귀하자 완전히 찍혀서[* 귀족 출신인데도 혁명을 지지하고 나폴레옹에게 충성한 것 때문인데, 이와 비슷한 인물로 [[루이니콜라 다부]]가 있다.] 나폴레옹의 휘하 요직 중 하나였던 추격기병대 지휘관의 직책을 박탈당하고, 군에서 퇴출당했으나 [[백일천하|나폴레옹이 엘바 섬에서 탈출하자]] 나폴레옹에게 달려가 재기용되었고, [[원수봉]]을 받음과 동시에 귀족원의 일원이 되었다. 그 후 나폴레옹을 따라 워털루 전투에서 예비 기병대를 지휘하게 되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